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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가작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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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술누리
댓글 0건 조회 158회 작성일 25-04-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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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산문학 박혜균


아버지


나는 애초에 치명적인 조건의 약점을 갖고 있었다.

2남 5녀의 넷째이자 넷째 딸.

첫딸은 살림 밑천이고, 둘째 딸은 자기 몫을 제대로 할 부모의 의지처이며,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하고, 맏아들은 집안의 기둥,

막내딸은 귀여워서 좋고, 막내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 했다.

그런데 내가 차고앉은 넷째 딸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넷째일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생후 6개월이 되자마자 본가를 떠나 외갓집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지금처럼 통신시설이나 교통이 발전된 시절이 아니어서 부모님을 뵙는 일은 일 년에 단 한

차례뿐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사는 본가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외갓집이 궁벽한 시골이라 중학교 통학을 할 조건이 되지 않아서였다.

어색했다.

아니, 나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허둥거려야 했다.

엄마는 내게 살가운 말을 전혀 하지 않으실 정도로 정이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넷째딸이어서 무시하셨고, 할아버지께서도 넷째 손녀인 내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세 언니와 여동생, 그리고 두 남동생도 내가 생경한 듯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분은 아버지셨다.

무서우리만치 예의범절을 따지시는 아버지 앞에서, 외할머니께 응석 부리며 자란 내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지적사항이 되어버렸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 앉는 일, 아니 한 공간에 있는 일조차도 버거웠다.

밥을 먹다가도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면 슬그머니 수저를 놓고 일어날 정도로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성적이 좋으면 아버지로부터 짧은 칭찬의 말씀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1등을 해도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말 없이 성적표에 확인도장만 찍어주실 뿐이었다.

나는 역시 아버지께도 별 필요 없는 넷째 딸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했다.

내 밑으로 둘이나 되는 남동생이 있어 아버지께서는 ‘대학’이라는 말조차도 꺼내지

않으셨고, 아버지가 무서운 나도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들처럼 서울에 가서 직장생활하고 싶다는 말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월급을 받으면 교통비와 점심값을 제외한 금액을 아버지께 드렸고, 아버지는 두 남동생의

공부를 위해 그 돈을 쓰셨다.

‘너도 이제 아가씨가 되었는데 옷이라도 사 입어라’며 따로 주시는 돈도 없었다.

나는 근무복만 입고 다니는 단벌 숙녀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다니던 회사는 경기악화로 부도를 맞게 되었다.

아버지께 돈을 드리지 못하는 2개월이 너무도 긴 시간으로 지나갔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했다.

다행스럽게도 일자리가 있었다.

친구의 자취방을 함께 쓰기로 하고 나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니, 평소처럼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없어져도 돈만 제때 드리면 괜찮다는 말씀인가보다’ 하면서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이번 기회에 나를 자식처럼 대하지도 않는 아버지로부터 떠나야겠다.’라는 서운함도 한몫했다.

나의 일은 야간 경리였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는 회사라 주간과 야간에 모두 경리사원이 필요한 회사였고,

주간에는 친구가 경리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말이 야간 경리이지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밤참도 사러 다녀야 했고, 공장이 바쁘면 현장에 가서 함께 일도 해야만 했다.

아예 작업복을 입고 근무해야 할 정도로 현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서 밥을 먹고 다니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열악한 식단도 문제였다.

라면, 된장국, 김치, 어묵볶음.

나와 친구의 반찬은 변함이 없었다.

그 통에 수시로 어지럼증이 몰려와 ‘집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버지의

무표정한 표정을 생각하면 차라리 현실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자고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전화를 바꿔 주셨다.

“서울역에 와 있다. 짐을 챙겨 이곳으로 오너라.”

참으로 듣기 힘든 아버지의 목소리셨다.

왜 짐을 챙겨야 하는지, 어떻게 올라오셨는지 여쭤보지도 못했다.

근무중인 친구에게 연락했다.

“우리 아버지가 서울역에 와 계셔. 짐을 챙겨 오라고 하시는데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하니?”

친구는 회사 걱정일랑 접어두고 아버지께 가라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친구가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 거였다.

아버지는 역 대기실에 앉아계셨다.

연신 담배를 새로 꺼내 무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그렇게 왜소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내게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위압적이고 무서운 분이신데 어찌 저리 작게 보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 옆에 앉았다.

“대구행으로 가장 빠른 시간표 두 장을 끊어오너라.”기차 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내 손을 잡으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엉겁결에 내 손을 잡아 뺐다.

“집에 가자. 가서 대학에 입학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이제는 네가 벌어 다 너를 위해 쓰면

되니 내려가야지.”

“어떻게 회사도 다니고 대학도 다녀요? 아부지는 어떻게 그런 말씀을?”

“왜 못 하냐?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가면 된단다. 야간대학에 다닐 수

있는 직장은 구해놓았으니, 학교 입학은 네가 잘 알아서 하려무나.”

아버지와 앉아 그렇게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인 데다가, 따뜻한 어감으로 대학진학을

말씀하시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살며시 가슴에 안으셨다.

“네가 있어서 참 든든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일을 잘 알아서 하기에 원래 말이 없나 보다

하면서 그냥 넘겼구나. 하지만 이번에 서울에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집이 아니겠냐?”

“저는 아버지가 무서웠어요. 엄마도 말씀이 없으시고 아버지도 말씀이 없으시고. 그냥

제가 그 집에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서, 아니 제가 쓸모없는 자식 같아서 서울에

왔어요. 제가 뭐 쓸모나 있나요? 넷째 딸인데.”

“왜 쓸모가 없느냐? 너는 우리 집의 중심이다. 위로 셋, 아래로 셋. 네가 딱 중앙이잖니?

중심이 자리를 잘 잡아야 위아래가 중심이 생기지. 너는 우리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란다. 네가 없어서 많이 허전하더라. 동생들도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저한테는 말이 없어요?”

“아마도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살아 공통점이 없어서일 게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아도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 알고 있단다. 이제 집에 가자. 공통점을 하나씩 만들어야지.”

나는 남들보다 4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아버지께서 구해주신 직장은 내 대학 생활을 배려해주셨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와 나는 누구보다 돈독한 부녀간이 되어 30년의 세월을 영유할 수 있었다.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문중의 모임이 있으면 아버지를 에스코트하여 다닐 때도

많았다.

간혹 아버지께서 서운한 말씀을 하시면 나는 역 대기실에서 나를 안아주셨던 아버지의

손길을 기억했다.

그 기억은 아버지께서 어떤 말씀이나 행동을 하셔도 내 서운함을 상쇄해주는 마약이었다.

그리고 그 마약은 내 삶에 있어서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소중한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3개월을 온전히 나와 함께 지내셨다.

서울까지의 통원생활이 칠순이 넘은 엄마께는 힘겨운 일이라, 아버지와의 동행은 항상

나였다.

서울역에서 내려 병원까지, 다시 병원에서 서울역을 거쳐 집으로 오는 일이 우리 부녀가

일주일마다 치러내야 하는 행사였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늘 씩씩하셨다.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나더러 몇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하잖아.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의 말씀과 달리 아버지께서는 죽음을 예약해둔다는 폐암 말기셨다.

새롭게 단장된 서울역 대기실에서 아버지는 살이 쏙 빠진 모습으로 내게 커피 한 잔을

뽑아주곤 하셨다.

“커피를 하루에 한 잔씩 마시면 심장병을 예방한다는구나. 너는 체질적으로 심장이

약하다고 하니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셔라.”

하지만 아버지의 씩씩함도 한계가 있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 서울로의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되어버린 날이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서울역에 도착했던 그 날.

새해를 보름여 앞둔 그 날의 햇살은 겨울 날씨답지 않게 너무도 청명했다.

커피를 한 잔 뽑아 오니 눈이 부실 정도의 햇살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울고 계셨다.

“더 살고 싶은데 안 될 것 같구나. 오늘이 내가 저 햇살을 보는 것이 마지막인 듯싶다.”

“아부지는 무슨 말씀이세요? 아주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의술이 좋아졌잖아요.”

그래도 아버지의 어깨는 들썩임을 멈출 줄 몰랐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를 그냥 가만히 안아드렸다.

30년 전 겨울, 아버지께서 나를 가슴에 안아주셨듯이 그냥 가만히 안아드리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을 되뇌었다.

“아부지가 저희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아세요?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의

중심이세요.”

아버지는 그날 오래오래 우셨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대구로 내려오시자마자 혼수상태가 되셨고, 새해가 시작되던 날의 새벽에

우리와 무언의 작별을 하셔야 했다.

50년을 함께 사신 엄마께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셨다.

우리는 육신이 사그라져버린 아버지를 한 번씩 안아드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해야 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2개월에 한 번 서울행을 하고 있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보면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된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대기실에 앉으면, 아버지와 마주 앉은 스물셋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네가 우리 집의 중심이야’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도 함께 들을 수 있다.

가끔은 환한 햇살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면 나는 늘 혼잣소리를 하면서 아버지를 기억해낸다.

‘아부지! 여기서 더는 아프지 않도록 살아볼게요. 그때처럼 저를 안아주세요.’

아버지가 그립다. 끝.

[이 게시물은 예술누리님에 의해 2025-04-15 09:35:47 공지사항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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