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입선「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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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선-산문학 신기수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195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하였고, 6학년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서울 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사고로 선친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집안 장남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지만, 워낙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기에 앞날을 향해 열심히 내달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
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한 저는 전공은 물론, 외국어 습득과 각종 과외 활동, 학우들과의
친교에도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누구보다 앞서고자 노력하였고, 그랬기에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R.O.T.C. 통역 장교로서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대기업 무역부에 입사하였습니다.
회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동료들은 물론 상사나 부하 직원들로부터 전도유망한
사원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중소기업으로 회사를 옮겼습니다. 예상대로 입사한지 몇 달 만에
경영진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여러 동료의 시기와 부러움을 받으면서 제게 그런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저 자신이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1980년 12월 제 나이 스물여덟 살, 아내 크리스티나를 만나 혼인성사로 성가정을
이루었고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천하를 얻은 듯 기쁨에 넘쳤고, 세상에서 제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들과 친구들의 축복과 기대를 받으면서, 제가 그 모든 것을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받고 있는 거라는 참으로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명석한 두뇌와 강한 의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치던 저는 직장의 더 높은 자리도 금방 손에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만심으로 가득 찬 제 안에는 하느님께 내어 드릴 자리가 없었습니다.
1982년 3월 25일, 제 운명을 바꿔 놓은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날은 마침 회사 동료
직원들을 집에 초대하여 자랑스럽게 아들 백일잔치를 벌인 다음 날이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많은 양의 상품을 수입해 가는 일본인 바이어가 우리 계열사에 찾아왔는데
본사에 근무하던 제가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그를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접대는
강남의 어느 호화로운 룸살롱에서 이루어졌고, 늦은 밤 접대가 끝나자 저는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택시 뒷자리에 피곤한 몸을 기대자 금세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한순간 저는 날카로운 충격과 극심한 고통으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가 탄 택시는 야심한 밤길을 무섭게 질주하는 말 그대로 총알택시였고 그만 사고가 난
것입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강북 쪽에서 오던 자가용이 음주 운전으로 잠수교 중간쯤에서
미끄러져 제가 탄 차에 정면으로 충돌했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온 교통경찰은
경찰 생활 십여 년에 그렇게 참혹한 광경은 처음 보았다고 했고,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의사는 제가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제
상태를 막내동생 마리아가 쓴 병상 일지를 나중에 보고 알았습니다. 저는 혼수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온몸에 깁스를 하고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저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고, 사고가 난 지 23일째 되던 날 제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눈가에는 눈물이 흘렀답니다. 가족들은 제가 말을 알아듣게
됐다고 생각해 감사를 드리며, 가족 모두 하느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34일째 저는 한쪽 눈을 뜰 수 있게 되었고, 손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서투르게나마 글씨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0일째 되던 날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말이 바로
‘아멘!’이었다고 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이라지만, 졸지에 당한 불행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필이면 제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일찍 남편을 잃고 저를 잘 키워 주신 어머니, 사랑의 결실인 첫아들을
얻어 행복해하던 아내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는 게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나간 남편을 한밤중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병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제 아내는 혼이 나간 듯 허둥거리는
어머니와 함께 제발 남편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정신이 들자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남편이
이런 사고를 당해야 하지. 이런 얘기는 신문 한 쪽 구석에나 나오는 얘긴데... 이런 걸 두고
청상과부가 된다는 거였구나’ 등 온갖 생각으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냉철하고 현명한
아내는, 그날따라 유난히 애처롭게 보이는 젖먹이 어린 아들의 눈동자를 보며, 그 아이를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이로 크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제 의식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의 제일 큰 의문은 ‘왜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단 말인가’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말씀하셨
습니다.
그해 9월 12일, 사고 후 처음으로 서울 가회동 성당에 갔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미사
참례를 하며 저는 감격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님의 품에 안긴
저는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끌고 아버지께 돌아온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아들 모습처럼
울고 또 울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속된 말로 아주 잘 나가던 시절, 1981년 일 년 동안 저는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미사 참례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영세한지 이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리고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 부부가 혼인성사를 받았음에도, 또한 우리에게
귀한 자식을 선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까마득히 주님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라는 큰 고통은 세속 일에 눈이 멀어 버린 저희 부부를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초, 사고 발생 여덟 달 만에 저는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이웃, 특히 제 아내와 아들, 가족들을 통해 제게 하느님 사랑을 가득 부어 주심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두 살 반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을 통해서도 제게 주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일어서면 그 어린 것이 얼른 저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었고, 제가 지팡이를 짚고 현관을 향하면 아들은 먼저 달려와 운동화를
챙겨주곤 하였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고 방에 앉아 있노라면 아들이 제 발바닥이 더러운 걸
보고 “아빠 지지” 하며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변기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 합니다. 제가 변기 위에 걸터앉으면 아들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사리 손으로 제
발에 비누질을 하고 말끔히 닦아 줍니다. 그 순간, 저는 주님께서 손수 제 발을 씻어 주시는
듯이 느껴졌고 매우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의 발을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어 주시는 겸손을 저에게도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제 기도
시간에 아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아들은 친구들에게 “아빠, 기도!” 하면서 친구들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또 제가 외출 전후에 성모님께 꼭 인사를 드렸는데, 어쩌다 제가
잊고 안 하면 아들이 성모상 앞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하여 제가 인사를 안
드린 사실을 깨우쳐 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에게서 하느님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 건강 상태가 조금씩 회복되고 젖먹이 큰아들이 네 살이 될 무렵, 저희에게 둘째아들
지 후가 태어났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장 역할을 대신 짊어지게 된 아내는 세를 놓은
점포 문구점을 인수해 직접 경영하였는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가게를 보아야 했으므로
아내는 정말 힘들게 지냈습니다. 당시 아내와 어머니는 아침에 제 동생들 출근시키랴,
집안청소하랴, 그해 태어난 둘째 아이 돌보랴, 기저귀 빨래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저는 기도에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뜻을 존중하고 가족과 일치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가 가족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우리 가정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이불과 요를 개어 옷장에 넣기 시작했고, 방도 쓸며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하찮은 일처럼 보이겠지만, 저로선
가정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과 기쁨이 컸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집안 살림을 거의
도맡아 해주셨고 틈틈이 가게도 지켜 주시는 덕택에, 아내는 문구점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문구점이 제법 자리를 잡아갈 무렵, 어머니 신경통이 도져서
더이상 가게 일을 도와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아르바이트생을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가족들이 고민할 때, 불쑥 그 일을 제가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진열대 꼭대기에 있는
학용품을 꺼내 주기도 힘들 것 같고, 말이 빨라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잘될지 의문스러웠던
것입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판단력이나 정신력은 아직도 어린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가 돈을 받고 거슬러 주며 물건을 팔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별다른 해결책도 없었으므로 아내는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적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고, 문방구 일은 우리 부부가 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내는 혹시
물건을 사러 온 아이들이 제 불편한 모습을 보고 놀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자극제가 필요했습니다. 그저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으론 변화가
없었고, 무엇인가 부딪쳐서 자기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제 의식 세계는 날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문구점을 돕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아내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의지하던 남편을 이젠 자신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이처럼 모든
걸 아내한테 의지했던 어린애 같은 제가 어느새 든든하고 믿음직한 남편 본래의 모습으로
아내 곁에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내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으면서 도울 수 있게 되자,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 이 자주 생겼습니다. 한번은 손님이 찾는 상품을 얼른 못 찾아 아내에게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아내는 몇 번씩 이야기해 주었는데 또 물어본다고 화를 내었습니다. 저는
문구점을 보면서 기도도 열심히 하느라 신경 못써서 그런 건데 그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내가 야속했습니다. 아내도 가르쳐 줘도 매일 몇 번씩 물어보는 남편이 참으로 미웠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님께서 축복해주신 이 문구점에서 당신의 선물이고 제 행복인
아내와 함께 영업할 수 있게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크리스티나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아내와 호흡을 잘 맞추어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저 자신을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일치가 없는 최선보다 일치를 이룬 차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항상 하느님 뜻을 살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문구점 운영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지자, 아내는 남대문 새벽시장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교통사고 후유증은 남아있었지만, 정신을 되찾게 되자 문구점
일 대신 좀 더 부가 가치가 있는 저만의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제 두뇌를 살려 중.고등학생들에게 수학 과외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아내는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꾸리아 단장을 지낸 형제님 병문안을
갔다가, 수학 과외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기꺼이 작은아들을 맡겨 주었습니다.
저는 옛 기억을 되살려 열심히 가르쳤고, 그 후 그 학생 학교 성적이 오르면서 제가 수학을
가르치는 실력이 괜찮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소문이
번져 나갔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고정적으로 그룹 과외와
단독 과외를 하게 되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은 물론 경제적 독립까지도 이룬
셈입니다. 그 후 중고생 학생들에게 수학 지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말이 부족한 저에게 학생들을 맡겨 주셔서 제 가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성모님께 묵주 기도와 삼종 기도를 드렸습니다. 은총을 받은
덕분으로 학생들 성적이 많이 올라 어머니들이 고마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한편, 아내 크리스티나는 남대문 시장 일을 보면서 더욱 억척스러워졌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수줍은 새색시였는데, 유능하고 건강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중증
장애인이 된 데다 시어머님을 비롯한 일곱 식구의 가장이 돼야 했기에, 환경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아내는 아직 여명이 밝기도 전인 이른 시각
새벽 3시, 가족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집을 나섭니다. 저는 아내가 현관문을 잠그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늘 미안함과 감사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오후 5시경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아내, 고생이라 고는 모르던 아내가 저를 대신해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마냥
가슴이 시렸습니다. 며느리를 생활 전선에 내보내는 어머니의 심정도 저와 같았습니다.
여느 시어머니 같으면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편히 지내실 텐데 아들이 온전치
못하니, 저도 저지만 며느리가 여간 불쌍하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며느리를 대신해 항상 즐겁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십니다. 이 자리에서 집안일을 맡아
주시는 어머니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옷 장사가 적성에 맞지 않아 우리 부부는 주님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고, 아내는
액세서리 점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던 중 마땅한 점포 자리가 나서 아내는 점포를
얻어 영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포도 좋은 자리였지만 액세서리 파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자 점포 주인의 권유에 따라, 어머님 칠순 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으로
점포를 계약했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처제에게 돈을 빌려 마침내 점포를
사들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을 산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저를 살리시어 영과 육을 치유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내는 이제 점포를 구입할 때 받은
은행 융자금을 모두 상환하고, 지금은 46평짜리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발을 닦아 주고 제 마음에 하느님 사랑을 느끼게
해준 큰아들은 대학 졸업 후 2010년 6월에 결혼하여 2011년 8월에는 제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제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후 선물로 주신 작은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직장생활 중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늦은 밤이면 화목하게 한자리에 둘러앉아 아내가
부업장에서 회수해 오는 머리띠와 머리핀 포장 작업을 하면서 오순도순 정겨운 대화를
나눕니다. 모든 것이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에게 베푸신 하느님 사랑을 전할 때나, 중.고등학생 수학지도를 하였을 때나, 가족과의
일치. 두 아들 교육 문제 등 생활의 모든 문제를 미사성제와 성체 그리고 공동체 형제들과의
사 검을 통해 받은 은혜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죽었는데 주님께서 살려 주셨으니
당신은 주님의 것이에요. 가게는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주님의 일만 하세요”라고 말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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