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가작 _「새싹 위에 햇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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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작-산문학 박옥현
새싹 위에 햇살이
출근 준비로 분주한 아내를 대신해 아침 밥상을 준비한 어스름 이른 새벽, 작은 창문 너머
상큼한 바람이 새벽 코끝에 매달려 희망과 기쁨의 새날을 맞는다. 아내의 씻는 물소리가
그치고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들린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녀석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연신
싱글벙글 동서남북 사방팔방 제 세상 좋아하는 체육시간인가보다. 한사발의 된장찌개와
작은 그릇에 구수한 하얀 밥의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고 아내의 머릿결 향기가 식탁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아내의 뒷모습을 빛나게 한다. 식사를 마친 아내는 외투를 입고 신발을
찾아 신는다. 좋은 날 되고 잘 갔다 와요~ 말하니 어느새 옆에 온 아들 녀석 능글맞게
어머니 수고하세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현관문을 열고나서는 아내의 등 뒤로 기다렸다는 듯 밝아오는 아침 찬바람이 볼을
스쳐 정신이 번쩍 든다. 아들이 다시 들어가면서 여덟시에 깨워 주라기에 알았다 말하고
나도 출근 준비를 한다. 어느새 여덟시 아들을 깨우고 밖을 보니 삼거리 백목련 나무가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아들만큼 자란 키에 물오른 새싹 위에 맑고 고운 햇살이 앉은
높은 하늘이다. 둘만의 식사 시간 하얀 둥근 접시에 찌그러진 계란후라이, 우유 한잔,
토마토 케첩 뿌려서 말없이 비벼 먹는다. 흔적을 찬물에 씻고 아들은 학교로 가고 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향한다. 아들이 가면서 좋은 날 되라면서 손을 흔든다. 지팡이
없으면 불편해 하던 녀석이 벌써 13살이라니.. 참 강물같은 야속한 시간이다. 퇴근 시간되면
마중 나온 녀석을 볼 때면 늘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하다.
2019년 11월 중순 어느 날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뇌신경과 전문의로부터 진료 결과를
들었던 그날 이후에 많은 생활의 변화가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종사한 시간이 30여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생활했는데 뇌병변 장애란 말을 듣고 ‘왜’ 란 말만 되뇌이며
한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까운 시간을 보냈었다. 의지와 다르게 흔들리는 몸 나중에는
치매까지 온다고 하니 겁도 나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작은 공동체 나의 가족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아내와 아들 녀석을 보고 걸었다. 뒤로 숨지 않기로 했다. 장애인자립
생활센터가 나의 직장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진정 따뜻한 마음을 알게 해준 곳이다.
2020년 05월 20일 장애등록을 하고 07월부터 12월 매듭달까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장애인 공공근로 권익옹호란 활동을 장애인자립기관에서 하고 2021년에는 강서구청에서
시행하는 장애인 일자리를 통해 다른 장애인자립기관에서 사무보조 업무 발열체크와
후원물품 정리 및 방역활동을 했다. 전에 했던 장비임대 사업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제
육( 肉)이지만 지금 내 마음은 하루하루가 즐겁고 아쉽다.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의 잠 든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리다.
약한 몸으로 어르신들 대소변을 받는다고 한다. 또래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워 지는
아들이나 아내에게 부족함 없이 채워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해주어서 제일 미안하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웃음을 전할 수 있어 위안을 삼는다. 아내와 서로 인정하고
공감하는 소통의 시간도 많아지고 아들과의 스킨십도 많아져서 서로서로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많이 느낀다.
천사같은 아들과 부대끼며 생활한지 629일째 지금은 교육생이다. 2022년에도
장애인일자리 사업에 지원했지만, 아쉽게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참여 했는지 모두 사정이 있으리라 그래도 다행히 2021년에 근무했던 곳에서 고용지원
교육생으로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정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구경하며
향기 나는 웃음꽃 가득 담아 손에 손 잡고 같이 가고 싶다. 가다보면 개나리 울타리 돌 뿌리,
들에 핀 들국화 징검다리도 있겠지만 조금 더 가면 활짝 핀 장미가 우리를 반길 것이다.
앞만 보고 지냈던 내가 이제 옆의 풍경도 보고 하늘을 본다.
이렇게 변화 된 내가 나였던가 놀라기도 아쉬움을 남기고 간 커다랗고 선한 눈빛이 신축년
소로부터 이어받은 희망과 기쁨의 임인년 물오름달이다.
순간 순간이 귀한 시간 흔적없이 가버린 해오름달 새싹위에 앉은 포근한 햇살을 시샘하던
입춘의 시샘달 우수도 경칩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찬 바람 찬 이슬 이겨낸 여린 나무 가지에
살찐 새싹이 돋고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에 파란 새 생명이 움튼다.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도
가볍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면서 내가
33년전 이날에 군대 입대 하던 날이다.
아내는 오늘도 새벽녘 선거 참관인 아르바이트를 갔다. 어느 선배가 미래 일은 장담하는게
아니라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뇌병변 장애를 친구로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생소했던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을 하면서 배우고 느끼고 공공근로 전일제를 하면서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 활동보조 선생님들이 자기 서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음의 변화가 잔잔한 평화를 준다. 순간순간이 귀하고 아까운 시간, 다시 돋은 희망의
새싹처럼 역경을 경력 삼으려고 2022년 열린사이버대학교에 입학했다. 사회복지학과
신입생이다. 지천명하고도 네 살, 열심히 배워서 끝마치고 싶은데 건강이 허락 할는지
의문이다. 강산이 네 번 바뀌고 무사히 졸업하게 되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어떤 이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용기를 주고 싶다. 내가 희망과 기쁨을 받았듯이 말이다.
대지에도 하늘에도 매달린 물오른 희망의 새싹처럼 다시 웃음 꽃이 피우고 함께 가고 싶다.
봄에 따뜻한 햇살처럼..
가슴으로 낳은 두 딸
큰 딸은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들은 독립해서 살고 있다.
효주와 효진이는 아빠와 함께 있고 남편은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다.
나는 혼자 남았다.
그 많던 가족들이 다 떨어져 살다 보니 혼자 남은 나는 때로는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많다.
그럴 때 유일한 친구는 독서다.
전자도서, 녹음도서 책 읽다 보면 현실을 잊어버리고 책 속의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독서 삼매경에 푹 빠져있는데
똑똑똑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나는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왔을까?’ 현관 쪽으로 나가며 누구세요 하니
대답은 없고 또 똑똑똑 다시 두드렸다.
밤중이라 함부로 문 열어줄수도 없고 “누구세요?” 하는데 살며시 무서운 생각이 들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슬그머니 겁이 났다.
그때서야 “나 효주야” 하는데 무서웠던 마음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쳤다.
참으로 반가운 목소리였다.
얼른 문을 열고 “어서 와 내 딸” 팔을 벌려서 꼭 끌어안았다.
“엄마 미안해, 자주 오지 못해서 엄마 보러온다면서 못 왔어.”
“그래. 엄마도 너희들 많이 보고 싶었단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더욱 반가웠다.
아이들이 직장에서 늦게 끝나고 피곤함에도 우리 집에 온 것이다.
하나님이 두 딸을 외로울까봐 보내주셨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 귀중하고 큰 선물을 주셨다.
지금도 두 아이들은 엄마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아이들이 직장에 나간 후로 만나기가 어렵다. 헤어져 있으니까 때로는 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보고 싶으면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보내면서 마음을 달래며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생모가 키우지 않았어도 아빠가 바쁜 일정 속에서 틈을 내서 데리고
운동을 하러 다니고 거의 매일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이 잘 큰 것 같다.
이 아파트로 이사하고 몇 개월 안 되어서 조카들이 나에게 오게 되었다.
이렇게 효주와 효진이가 내 품에 오게 된 것은 시동생이 이혼해서 그 아이들을 두고
직장에서 마음 놓고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7형제 중 막내시동생인데 다른 형제들은 아이들을 돌보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나의 아들, 딸에게 “효주 데려오면 어떨까? 너희들도 생각해봐라.”
그러자 아이들이 “나는 상관없어, 동생 생겨서 좋아. 엄마가 힘이 많이 들텐데. 엄마 의견에
따르겠어.”
‘내가 시각장애인인데 괜한 짓 하는 게 아닌가?’ 많이 고민을 하다보니 며칠이 지났다.
고민 끝에 결정을 하고 시동생에게 어렵게 상의를 했다.
“아이들 내가 데리고 있으면 안될까요, 잘 해주지는 못하지만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살게요.”
“형수가 힘들어서 어떻게 하려구요”
시동생은 나에게 맡기는것을 꺼려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고 거기에다 건강하지 못 해서 힘들어할까봐 그랬나보다.
효주와 효진이는 이렇게 나에게 온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저녁에 아빠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처음에 효주가 먼저 왔다. 효주는 아홉 살 이였는데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 학교에
다녀오면 별로 말이 없었고 시무룩하며 멍하니 앉아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효주를 데리고 있기가 참 힘이 들었다.
엄마가 보고도 싶고 나하고도 낯설어서인지 집에 들어오면 서먹서먹 남의 집에 온 것 같이
힘든가보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그 아이가 측은하고 안쓰러워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때마다 효주를 안고 나도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효주에게 더 정을 주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게 이십여 일이 지나가고 그때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먹고 싶은 것도 해달라고 하며 명랑하게 잘 지냈다.
효주가 변한 모습을 보고 나는 아주 기뻤다.
학교에 다녀와서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고 나와 함께 마트에도 가고 시장에도 함께
다녀왔다.
주일이면 교회에도 나와 함께 다녀오며,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와 함께 있었다.
이렇게 효주는 나와 끈끈하게 정을 쌓아갔다. 그런데 가끔 동생 효진이가 보고 싶은가
보다.
나에게 효진이 이야기를 하며 “효진이는 어떻게 지낼까?” 하곤 했다.
“효주야 효진이 보고 싶니?”물어보니 “큰엄마 효진이 보고 싶어 효진이 데려다주면
않돼요?” 하곤 눈치를 살폈다.
나는 시동생에게 효주가 효진이를 많이 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어느 날 시동생은 효주와 함께 효주 외가에 가서 효진이를 데리고 왔다.
둘이서 있으니까 재잘거리며 잘 놀았다.
5살 된 효진이가 하루는 달랠 수 없을 만큼 울어서 “너 이렇게 울면 시골 엄마에게
데려다줄거야” 하니까 울음을 뚝 끄첬다.
친엄마인데 어떻게 했으면 자기 엄마에게 데려다준다고 하니까 울던 울음을 그칠까
그동안 얼마나 구박을 받고 살았기에 저렇게 생모 이야기가 나오니 울음을 그치나 하고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마음속에서 니가 두 아이에게 누구보다 더 예뻐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효진이에게 더 잘 해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미안함과 안쓰러움에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내 품이 포근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는데 눈물 콧물 자국이 있어서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이
아이들을 내가 돌보기로 했으니 더욱더 사랑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효주와 효진이는 나를 보고 처음에는 큰엄마라고 하더니 언제인가부터 우연히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불렀다.
아이들 생모는 시골 엄마라고 부르고 나는 엄마라고 불렀다.
자녀가 둘이 갑자기 더 생기니까 장난감 책상 피아노 등등 들어오니 살림살이도 많아지고
좁은 집이 내 마음처럼 꽉 찼다. 아이들은 명랑하게 잘 지냈다.
그렇게 같이 지내다보니 조카들이나 내가 낳은 아이들이나 똑같이 사랑스러웠다.
효진이는 어쩌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다.
효진이가 그렇게 나와 함께 노래도 하고 같이 있으면 재잘재잘 말도 잘 했다.
누구든지 잘못하면 큰아이는 큰아이답게 막내는 막내답게 벌을 세우고 조카들이나 내가
낳은 아이들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같았다.
아니다 그 말은 거짓말이다. 효진이가 더 귀엽고 효진이에게 더 정을 줄 수 밖에 없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안하던가 제일 어리고 귀여운 짓을 효진이가 더 많이 하니까 더
예쁘다.
큰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은 중학교 2학년, 효주는 초등학교 2학년, 효진이는
유치원생 다 나가고 나면 집안은 텅 빈 것 같다.
아이들을 다 등교시키고 하루종일 바쁘게 집안일을 하며 ‘어떻게 해야지? 저 아이들을 잘
키우나’ 걱정을 하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자 했다.
그리고 네가 할 것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효진이 유치원에서 현장 학습이다 견학이다 다니는 곳은 많았다.
네가 다니기가 좀 불편해도 그때마다 꼭 따라가야 할 곳은 다 따라갔다.
효진이가 많이 수줍어 하는 편이라 데리고 다녀야 마음이 놓였다.
세월은 빠르다더니 어느덧 유치원 졸업을 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처음에는 효진이 때문에 어디를 가지 못했다.
일 학년 초에는 학교에 보내고 설거지와 빨래를 정신없이 해놓고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그렇게 삼 주쯤 지나더니 저 혼자 갈 수 있다고 해서 뒤에서 따라와보니 집에 혼자서도 잘 왔다.
이렇게 하다 보니 그동안 5, 6년에 세월은 빨리 지나서 효진이가 어느덧 3학년이 되어서
부반장이 되었다.
그래서 자모회에 오라고 연락이 왔다.
부반장이라고 좋아하며 “엄마 내일 자모회 갈거지?” 하며 당연히 내가 갈 줄로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안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자모회 한번 참석하지 않았는데 효진이 때에 자모회 임원을 하게 되었다.
효진이가 좋아하는 일이면 내가 좀 힘이 들어도 하고 싶었다.
효진이가 내가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자모회에서도 내가 큰엄마인 줄도 모르고 나를 보고 왕언니라고 부르며 “욕심도 많아,
왕언니 효진이 몇 살에 낳았어요?” “늦둥이 낳았지요” 생모처럼 연극을 했다.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이 엄마라고 하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모녀 사이로 보았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주 안 보던 분들 께서 어느 사이 또 “집사님, 아이들을 낳아서 저렇게
키웠어” 하며 놀랐다.
그러면 나는 “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그렇게 한 집에서 10여년을 살다보니 어느 아이가 내가 낳았고 어느 아이가 조카인지 네
명이 마음 가는 것이 똑같고 정이 듬뿍 들었다.
어느 덧 효주가 크니까 집에 가서 잠만 자고 밥은 우리 집에 와서 먹었다. 시동생이랑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왔다갔다 할 수가 있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다가 효주가 스무 살이 넘어서 이제 “엄마, 내가 밥해 먹을게.”
하더니 “엄마, 된장찌개 어떻게 끓여?” 하고 찌개 끓이는 것을 물어보기도 하며 반찬
마음에 드는 것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이 20세가 넘더니 살림도 제법 잘한다.
말썽 한번 안 피우고 밝고 예쁘게 건강하게 참 잘 자랐다. 아이들이 착하고 예쁘게
자라줘서 참 고맙다. 이제 결혼만 잘 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나님은 나에게 큰 선물을 주셨다.
가슴으로 두 딸을 낳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 아이들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아이들이 나에게 왔을 때를 회상하며 지난 세월을 뒤돌릴 수 있다면 아이들을 좀 더
예뻐해 줄 것 같은데 많이 예뻐해 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
지금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항상 가까이 있는 것 같고 네 명 중에 한 명을 떠올리면
줄줄이 네 명의 아이들이 다 똑같아 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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