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우 수 상 「천천히,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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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우수-산문학 최숙하
천천히, 느리게....
나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엄마는 임신 7개월에 나를 낳았다. 갑자기 찾아온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뱃속 태아가 거꾸로 있는 둔위 상태였다.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1.25kg의 미숙아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첫 돌이 지난 후에도 목을 가누지 못했고 혼자 서거나 걷지도 못했다. 두 살이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뇌성마비였다. 지적 발달은 여섯 살쯤에서 멈추고 걷지
못할 것이며,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되는 강직 증상으로 인해 생활이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행히 비장애인과 비슷한 지적능력을 갖추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오랜 재활 과정을 거쳐 나는 열 살이 되어서야 경기 남부에 있는 ‘장애아동 주간
보호시설’에 생긴 초등학교 재택학급에 다니게 되었다. 뇌성마비 증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몸에 힘이 들어가 휠체어에 의지하고 말도 어눌하지만, 열다섯 살까지는 발판을
올려 혼자 휠체어에서 내렸고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움직였다. 바닥에서 무릎을
굽혀 안전 손잡이를 잡고 서거나 조금씩 걸을 수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지체부자유특수학교 중학부에 들어갔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중학부에 입학해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했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초등학생일 때는 국어만 수학만 배웠는데, 중학생이 되어서야
다양한 과목을 접하고 공부해야 하니 공부가 어려웠고 기숙사 선생님들의 지나친 간섭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숙사와 학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동휠체어를 타고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 나는 점차 음식에 의지하게 되었고, 스트레칭과 걷기와 앉았다 서기 같은 재활 운동도
차차 멀리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골반 근육이 짧아졌고 장애는 점점 심해졌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뚱뚱해진 데다 무릎 관절이 나빠졌다.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
싱크대를 잡거나 화장실 안전 손잡이를 잡고 서 있을 수는 있지만 오래 서 있게 되면 발목과
다리가 아픈 지경에 이르렀다. 예전엔 휠체어에서 미끄러지거나 바닥에 주저앉게 되면
무릎을 굽힌 뒤에 바닥에 붙이고 팔을 펴서 윗몸을 올려 무릎으로 서서 몸을 세워 책상이나
안전 손잡이를 잡고 설 수 있었는데, 이젠 무릎이 너무 아파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속상한 마음에 울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재활을 계속했다면 내 몸도, 내 마음도 힘들지 않았을까?’
수도권 한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집에서는 주로 변기 의자에 앉아 있게 되었다. 집
화장실이 좁은데다 턱이 있어서 휠체어로 움직이는 게 불편해서였다. 변기 의자는 양쪽에
손잡이와 작은 바퀴도 네 개 있다. 팔걸이 아래에 버튼이 있어 팔걸이도 올릴 수 있디.
아침저녁으로 변기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누울 때도 도움이 필요하다. 몸이 뻣뻣하고
힘이 들어가서 혼자 자유롭게 다리를 굽힐 수 없고 팔과 손도 자유롭지 않기에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져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 살이 벗겨져 따가웠다. 내
엉덩이에는 많은 상처와 흉터가 생겼다. 지금은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엄마가 번갈아 가며
약을 발라준 덕에 회복되고 있다.
상처가 많고 뚱뚱한 몸이지만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도 쓰고
독수리타법으로 컴퓨터 자판도 치고 양치도 한다.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면 막대기로
핸드폰 케이스에 연결된 줄을 잡고 주울 수 있다. 밖에서는 물건이 떨어지면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질까 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때가 많지만, 이것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전동휠체어 운전도 한다. 발이 앞쪽으로 뻗치는 것을 막기 위해 휠체어 찍찍이를
발판을 지탱해 주는 곳에 붙이고 배 위에 안전띠를 채우면 외출 준비가 끝난다.
그렇지만 외출하게 되면 길눈이 어두운 탓에 길을 외우지 못할뿐더러 활동지원사
선생님을 따라 허둥지둥 빨리 달리다가 휠체어가 꼬꾸라질까 봐 무서울 때도 많고
긴장으로 다리를 뻗치는 게 훨씬 심해져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운전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세상에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외출을
잠시 멈출 때도 있었지만, 최근 코로나19의 기세가 한풀 꺾여서 느리지만 천천히 세상과
만나고 있다.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지만, 과락을 면하던 성적이었고 선후배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내 장애에 관한 회의에 빠져 방황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경제 자립을 위해 장애인을 뽑는다는 회사 여러 곳에 면접을 봤지만 나
같은 뇌성마비 장애 여성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26살 때부터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장애인 재택근무의 단순노동뿐이었다.
그 단순노동은 SNS 게시물을 공유하거나 엑셀 파일에 검색한 기사의 제목과 인터넷 주소와
출처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돈을 버는 것은 좋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기에
점점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2018년 3월부터 장애인 야학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그저 글 쓰는 걸 배우는 게 좋았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소설을 쓰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글을 쓰는 재능이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점차 소설가 선생님에게 글쓰기와 합평 수업을 들으며 자신감을 찾고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되면서 소설가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뇌성마비 장애 여성으로서 ‘소설가’라는 꿈을 지키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마음속에 있는
내 이야기를 꺼내 보이는 게 두려웠고 불편한 손을 움직여 독수리타법으로 글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 때론 손마디가 바스러질 듯 아팠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힘이 약해 책을 빨리
읽지도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게 운명이라 느낀 계기가 있었다. 3년 전에 한 월간지에
‘장애 여성으로 살아가기’라는 꼭지로 글을 연재하게 되었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었고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생겼다. 장애 여성의 이야기, 장애인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장애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 이후에도, 지금도.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힘들 때마다 되묻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에는 ‘장애’ 가 없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천 번, 만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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